공허한 삶과 계획하는 삶 (ft. ENTP가 ENTJ로 변하게 된 이유)
MBTI 검사에서 이제는 ENTJ로 굳혀졌지만, 어릴때만 해도 나의 MBTI는 ENTP였다.
그리고 MBTI에 관한 설명이나 짤들을 보다보면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ENTJ, ENTP, INTJ, INTP적 성향이 조금씩 다 섞여있다고 느낀다. 물론 ENTJ적 성향이 가장 강하고 그 다음으로 ENTP, INTJ가 그나마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ENTP가 더 강하다고 느낀다. 이런 점들은 과거 ENTP 출신(?)의 흔적이려나?
어쨌건 지금 돌이켜보면, ENTP였던 나의 성향이 바뀌게 된 것은 아마도 '공허함'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공허함.
나는 이 망할 녀석을 내 인생에서 쫓아내기 위해 계획이라는 녀석을 내 삶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도 억압을 싫어하고 자유를 갈망했으며, 룰브레이커적인 면모와 함께 늘상 Why not? 을 외치며 정해진 틀을 앞장서서 파괴해왔던 나에게
계획이란 오직 '계획짜기'라는 행동을 하고 싶을 때 그 행동의 결과물로서 생산되는 배설물이자 흔적이었을 뿐, 나에게 유의미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삶은 감정의 낙폭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끼게 되면서, 그때부터 나는 계획이라는 녀석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 같다.
즉흥적 삶의 요동치는 감정상태는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 "理" 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므로..
아니 어쩌면 감정의 낙폭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부터 理와 계획이 함께 내게 찾아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려나?
무엇을 다스리기$^理$ 위해서는 그것을 내다보고 꿰뚫어$^{계획}$볼 수 있어야 하므로 양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어쨌건 그렇게 나는 '계획'을 내 의식의 방에 들여놓게 되었다.
달성했을 때 결코 공허하지 않을 수 있는
내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뒤
그 계획을 하루하루 실천해 나가면
그러한 계획의 이행행위 자체가 '공허하지 않을 목표'의 실현을 위한 행위이므로
내가 목표와 계획을 잘못 설정한게 아니라면, 그런 행위로부터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논증적 토대 위에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함이 느껴진다면, 목표나 계획을 잘못 설정한 것이므로
나는 목표와 계획의 문제점을 되짚어보고 개선된 목표와 계획을 세우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계획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계획을 다 지키며 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ENTP적 성향의 잔존인지, 원래 다른 NTJ도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ENTJ로 평가되는 지금도, 여전히 계획에 억압된 삶을 살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는 못 살 것 같다.
왜냐하면, 계획이란 결국 정해진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내 나름의 최적화된 행동의 단위이자 실천방안일 뿐이기 때문이다.
계획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계획은 철저히 수단이다.
따라서, 계획을 짜는 단계에 고려하지 못했던 어떤 정보가 사후적으로 파악된다면, 당연히 최적화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나에게 계획은 결코 절대적인 불변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그러나 무슨 의미인지 와닿지 않았을), 나에게 계획이란 먼저 내다보고 꿰뚫어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니기에 여전히 계획은 나에게 중요하며, 나는 계획하는 삶을 살고 있다.
계획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계획하는 삶.
그것이 나의 삶이다.
나는 목표 없이
꿈으로의 정진 없이
삶의 진척 없이
공허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공허하지 않으려면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아야하고, 꿈으로의 정진이 있어야하고, 삶의 진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맛있는 밥을 먹었다고 해서 무엇인가 유의미한 행동을 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맛을 탐하는 그 순간이 비록 즐겁고, 혀와 입의 미각과 촉각이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어 말 그대로 '감각'의 희열을 가져다 주는 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지만
이는 내 삶의 꿈이나 목표의 실현과 크게 연관된 행동이 아니므로, 그런 의미에서 이 순간들은 소중하고 행복하지만 동시에 무의미한 순간들이다.
그리고 이런 순간들로만 삶이 가득차면 우리는 어느 순간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손을 뻗어도 그 무엇도 잡히지 않는 삶.
되돌아보았더니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삶.
소비의 만족감, 순간의 쾌락, 타인에 대한 우월감 등으로 채워져 한없이 반짝이고 환하게 빛나던 삶의 '공간'은 필연적으로 어느 순간 조명이 꺼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삶이 어느 순간 끝없는 어둠만이 남고, 모든 것이 사라져 텅 빈 공간에 홀로 존재하게 되는 이유는 말 그대로 그것들은 순간의 신기루였을뿐, 당신 삶의 '공간'에 들어온 적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그것들은 삶의 '공간'에 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물을 한 손으로 움켜쥘 수 없듯이...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신기루가 비록 허상이긴 해도 우리는 신기루라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소비의 만족감, 순간의 쾌락, 타인에 대한 우월감 등이 당신 삶에 있어서 부존재했다고 몰아세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존재했으나 결국 허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즉, 그 순간 반짝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짝임은 실재$^{實在}$했으나 그것은 거짓된 반짝임이었다는 것을 짚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고독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내가 추구하는 삶과의 고독감과 거리감을 느끼는 그 순간이다.
내 삶이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다는걸 깨닫는 그 순간.
바로 공허한 순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기루가 아니라 실체적이고 실질적인
내가 원하는 '내 삶'을 좇아야한다.
따라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앞을 총명하게 내다보고$^{계획}$
그 계획을 바탕으로 삶을 주도적으로 컨트롤$^理$해야 한다.
그렇게 살면
우리는 결코 공허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